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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3월 18일 일요일

몬테 카지노의 베네딕트 수도원



기도-노동, 복종-자유의 균형 등 극단을 떠나 중용 제시

몬테 카지노를 아는가? 언뜻 들으면 모나코의 카지노를 생각나게 한다. 그러나 모나코의 카지노가 아니라 이탈리아의 카지노다. 정확히 말하면 몬테 카지노는 이탈리아 라치오 지방 카지노 시에 있는 산(Monte) 이름이다. 높이는 해발 519m. 이 산에 1500년 동안 서구 정신사에 영향을 준 수도원이 하나 서 있다. 이름은 베네딕트 수도원.

멀리서 볼 때 산 정상에 무슨 건물 하나가 서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정상으로 올라갈수록 시야는 달라진다. 마침내 정상에 오르면 마치 변화산에 올라온 듯 감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산 아래 펼쳐진 움부리아 평원은 온통 운무로 덮여 있고 멀리 보이는 산들은 마치 다도해처럼 펼쳐져 있다.

‘Pax(평화)’라고 쓰여 있는 정문을 지나면 정원이 나오고 정원에는 한 사람이 두 손을 높이 들고 서 있다. 베네딕트가 주후 547년 제자들에 부축되어 죽음을 맞이하고 있는 모습이다. 베네딕트는 임종을 앞두고 자기를 기다리는 주님 앞에 누워서 갈 수 없다며 성찬을 받은 후 서서 주님을 맞이하는 자세로 손을 들고 운명했다. 조금 더 들어가면 너른 광장이 나오고 광장 앞에는 지팡이를 든 또 하나의 동상이 나온다. 이 동상은 1943∼1944년, 2차 세계대전 때 독일군이 수도원을 최후의 방어선으로 요새화하여 전쟁하는 가운데 35만 명이 죽거나 다치고 건물도 거의 초토화된 가운데 유일하게 살아남은 베네딕트 자신의 또 다른 동상이다.

베네딕트가 이곳에 수도원을 세운 것은 주후 529년, 그는 그 이전에도 수비야코의 한 동굴에서 조용히 수도생활을 한 적이 있다. 그곳에서의 3년 수도생활을 통해 그는 영혼의 거듭남을 체험하며 수도생활의 기초를 쌓았다. 수비야코 수도 생활은 그 후에 베네딕트 수도원 운동의 요람이요, 그 자신이 하나님과 만났던 첫 사랑의 밀회장소였을 것이다.

베네딕트는 이곳으로 이주해 아폴로 신전이 있던 이곳을 정결케 한 후 무릎을 꿇고 수도원의 기초를 놓았다. 베네딕트가 후대의 영성사에 영향을 준 것이 있다면 그것은 ‘베네딕트 규칙(The Rule of Benedict)’일 것이다. 처음에 사람들은 이 규칙을 베네딕트 자신의 창작품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연구 결과 규칙집은 그 이전에 있었던 ‘스승의 규칙(Regula magistri)’을 상당 부분 모방한 것으로 나타났다. 대략 4분의 1은 스승의 규칙을 그대로 따랐고, 4분의 2는 많은 영향을 받았고, 나머지 4분의 1은 베네딕트 자신의 창안이라고 볼 수 있다.

베네딕트 규칙은 73장으로 되어 있고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1장에서 7장은 교리(원리)를 다루고, 8장에서 73장은 수도자들의 생활과 훈련(실제)을 다룬다. 규칙은 이렇게 시작한다. “내 아들아, 스승의 가르침에 조심스레 귀를 기울이고 너의 마음의 귀로 경청하라.”

베네딕트에게 수도원은 하나님의 학교였다. 그는 수도원을 ‘주님을 섬기는 학교’라고 불렀다. 학교라면 스승이 있고 제자가 있다. 수도자인 제자는 반드시 스승의 가르침을 따라야 한다. 베네딕트 수도원이 그 이전의 수도원에 대해 혁명적 발전을 이룬 것이 있다면 바로 수도자의 정착생활이다. 그 이전의 수도사들은 한 곳에 정착하지 않고 이곳저곳 떠돌아 다녔다. 그래서 베네딕트는 수도자를 네 종류로 나누었다. 공동체 질서 안에 사는 공동체 수도자(cenobites), 혼자 사는 독거 수도자(hermites), 규칙에 따라 살지 않고 자기 뜻대로 사는 사라바이트(sarabaites), 여기저기 정처 없이 옮겨 다니는 기로바구스(gyrovagus).

그는 모든 수도자는 반드시 한 곳에 정착할 것을 요구했다. 정착하지 않고 떠도는 수도자를 악한이라고까지 표현했다. 그래서 수도자가 될 때 반드시 ‘정주서원(定住誓願)’을 해야 했다. “반드시 수도자는 한 수도원에 소속하고 일단 소속하면 떠나지 마라.” 이것이 정주서원이다.

정주서원의 요구는 베네딕트의 메시지만이 아니다. 그것은 교회를 정하지 못한 채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며 교회방랑자로 사는 한국교회 일부 성도들에 대한 하나님 자신의 메시지이다.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해서 오는 문제는 신앙생활을 제대로 못한다는 것만이 아니라 그리스도 자신의 몸을 깨뜨린다는 것이다. 우리도 모르게 한 교회에 정착하지 못하고 떠돌 때 우리가 범하는 실수는 예수님의 몸 된 교회를 나도 모르게 깨뜨리는 것이다.

수도자가 한 곳에 머물러야 하는 것은 사막 교부들의 오래된 이상이었다. 성 안토니의 말과 같다. “물고기가 물 밖으로 나오면 죽는 것처럼 기도실(수실) 밖에서 빈둥거리거나 세상 사람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수도자들은 내면의 평화를 잃을 것이다. 물고기가 바다에서 헤엄치듯이 수도자는 기도실에서 살아야 한다. 그렇지 않고 밖에서 지체하면 반드시 내면의 경성을 잃게 된다.”(사막 교부들의 금언)

아마도 베네딕트가 후대 기독교 영성에 대해 남긴 큰 공헌은 균형의 영성일 것이다. 그는 베네딕트 규칙에서 다양한 영성적 삶을 균형 있게 조화시켰다. 기도와 노동, 공동체적 복종과 개인적 자유, 독거생활과 공동체적 질서, 엄격함과 관대함, 침묵과 사랑, 남성성과 여성성, 수도원장에 대한 절대적 권위와 동료 수도자와의 형제적 관계, 영적 생활은 예나 지금이나 그것을 열심히 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극단으로 치닫게 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이 옳다고 믿는 사람에게 극단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귀결일 수 있다. 율법주의가 그렇고 신비주의, 열광주의가 그렇다.

그러나 베네딕트는 영적 삶의 후퇴라고 볼 수도 있을 중용적 삶을 과감하게 선택하여 모든 사람이 적응할 수 있는 실용적 수도원 공동체를 만들어냈다. 그것이 베네딕트 운동이 오랜 세월 역사 속에서 지속될 수 있었던 이유다.

베네딕트의 균형적 영성에는 크게 네 가지 요소가 있다. 성경, 전통, 개인적 영성의 삶, 그리고 공동체적 삶이다. 성경과 하나님의 말씀은 베네딕트의 영성의 중심이다. 거룩한 독서와 묵상은 베네딕트 영적 삶의 핵심이다. 그는 전통으로부터 많은 교훈과 빛을 받았다. 그는 안토니, 카시안으로 이어진 이전 시대의 수도원 정신을 계승했으며 어거스틴에게서도 많은 영향을 받았다. 특히 카시안의 ‘강화집’은 그의 수도원 운동의 교과서였고 어거스틴에게 받은 영향은 11세기의 클레이보의 버나드를 통해 루터, 칼뱅에게까지 이어졌다.

개인적 영성의 삶은 베네딕트 영성의 일상이다. 새벽 5시에 일어나 하루에 일곱 번 드리는 성무일과는 베네딕트가 만들어낸 수도원 예배의 가장 큰 모델이었다. 노동은 베네딕트가 서방 사회에 끼친 가장 큰 영향 중 하나일 것이다. 노동을 경시하던 당시의 풍습에 노동을 기도만큼 중요시함으로써 수도원의 자립은 물론, 영성의 사회화에 크게 기여했다.

우리에게도 이런 조화와 균형이 필요하지 않을까? 길고 긴 교회의 역사에서 개신교 전통도 그냥 나온 것이 아니다. 혹시 우리는 우리 자신의 교파적 전통만을 고집하지 않는가? 전통주의는 나쁘지만 전통은 아름답다. 몬테 카지노를 내려오면서 하늘과 땅, 그 사이에 오묘하게 자리잡은 베네딕트 수도원이 1500년 동안 변함없이 세상을 비춘 이유를 묻고 또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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